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타람 술탄국 (문단 편집) ==== 트루나자야 봉기 ==== 아망쿠랏 1세의 치세에는 왕의 고압적인 정책에 반발하여 궁정과 지방에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누적된 불만은 1670년대 중반 마두라 서부 방칼란 지역 내 아로스바야(Arosbaya) 지방의 영주 트루나자야(Trunajaya, 1649–1680)가 일으킨 트루나자야 봉기(1674–1681)로 일거에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왕을 불신하는 태자 라맛이 마타람 휘하 카조란(Kajoran)의 영주 파늠바한 라마(Panembahan Rama), 그리고 라마의 사위 트루나자야와 공모해 트루나자야가 반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트루나자야 봉기는 트루나자야를 이용해 권좌에 오르려던 태자의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마타람 군대는 연거푸 패했고, 호전적인 마두라인들과 [[마카사르인]]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마타람의 수도 플레렛으로 진격한 트루나자야는 1677년 6월에 마타람군을 물리치고 플레렛을 점령해버렸다. 아망쿠랏 1세를 지지하지 않는 푸르바야 공(Pangeran Purbaya) 세력이나 과거 중앙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동부의 기리(Giri) 지역 등 마타람 내부 세력 일부도 트루나자야를 지지하고 반란군을 도왔다. 트루나자야는 '마두라 (출신의) 왕'(Panembahan Maduretna)으로 자칭하며 태자 라맛의 통제를 벗어났고, 트루나자야의 군대는 자바의 부가 모이던 영화로운 수도 플레렛과 마타람 궁전조차 약탈했다. 태자 라맛은 결국 부왕의 편으로 돌아서서 마타람 자체를 집어삼키려는 트루나자야와 적대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마타람군만으로 트루나자야 반란군을 막을 수 없음을 절감한 아망쿠랏 1세는 결국 그나마 친선 관계를 유지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던 아망쿠랏 1세는 퇴각하던 와중에 트갈(Tegal)에서 죽었다. 나중에 파쿠부워노 1세(재위 1704–1719)가 되는 푸그르 공(Pangeran Puger)도 1677년 혼란을 틈타 플레렛을 점거하고 도피 중인 아망쿠랏 1세를 계승한 태자 라맛, 즉 아망쿠랏 2세(Amangkurat II, 재위 1677–1703)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망쿠랏 2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트루나자야를 물리쳤지만, 대가로 구 마타람령 서부 자바의 [[보고르]], [[카라왕]], 파라향안 지역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아망쿠랏 2세는 전쟁 과정에서 아직 푸그르 공이 플레렛을 점거하고 있던 1680년 9월, 북쪽에 새로운 수도 카르타수라(Kartasura)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이듬해 푸그르 공은 항복했지만, 아망쿠랏 2세는 황폐해진 플레렛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대로 카르타수라가 마타람의 수도가 되었다. 이 카르타수라는 오늘날의 [[수라카르타]]와는 다른 곳이지만(오늘날 카르타수라는 수코하르조Sukoharjo현에 속함), 오늘날 수라카르타 바로 옆에 있으며 수라카르타 광역권에 속한다. 카르타수라는 1745년까지 마타람의 수도로 기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